광해군은 조선 제15대 왕으로 임진왜란 당시 분조 책임자로서 의병을 이끌고 백성을 보살피며 민심을 수습하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세자 책봉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며 즉위 이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였으며 대동법 정책을 실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재임 기간 폐모살제를 일으키며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인물로 광해군의 생애와 정치, 폐모살제, 인조반정의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광해군의 생애
-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왕으로 15년간 조선 왕위에 있었습니다. 선조에게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정실부인인 의인왕후에게서 적자가 없었으며 광해군의 어머니는 후궁 공빈 김씨는 장남 임해군과 차남 광해군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성격이 포악했던 임해군 대신 당시 18세였던 차남 광해군을 급하게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설치하며 책임을 떠맡기게 됩니다. 광해군은 분조의 책임자로서 의병을 지휘하고 독려하였으며 백성을 보살펴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선조의 왕비였던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새로운 왕비를 들이며 영창대군을 낳습니다. 이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지만 영창대군이 3세가 되던 해 선조가 지병으로 승하합니다. 결국 영창대군이 너무 어린 탓에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고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광해군의 정치
- 광해군은 즉위 이후 양전 사업을 실시하는 데 전면적인 토지 조사를 통해 누락된 토지를 찾아 세금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대동법을 통해 세금 제도를 전면 개혁하며 민심을 수습합니다. 대동법은 공납 즉, 일반 백성들이 수급하기 어려운 특산물 대신 토지를 기준으로 쌀, 베, 돈 등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방법입니다.
- 하지만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무리하게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준공하며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이르자 그동안 쌓아왔던 백성의 민심을 한순간에 잃게 됩니다.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과 기존 지배자였던 명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후금이 명나라보다 조선을 먼저 공격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후금과 대립하지 않고 다독이며 뒤로는 후금의 침략에 대비합니다. 하지만 후금이 명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생했고 명은 조선에 군사를 요청합니다.
- 신하들은 임진왜란 시 조선에 군사를 지원해 준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며 실리외교를 하는 것이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발로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내지만 명나라 원군 대장이었던 강홍립에게 후금과 앞장서서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항복하라고 중립적 외교를 지시합니다.
- 광해군 즉위 후부터 권력을 잃으며 불만이 많았던 서인들은 유교를 중시하던 조선에서 명나라를 배신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중립 외교를 비판하며 여기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둔 사건을 빌미로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인조반정
- '폐모살제' 어머니를 죽이고 동생을 죽이다 라는 뜻으로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 방에 장작불을 지펴 뜨겁게 만들어 죽인 사건입니다. 이는 서인들의 반발을 일으키고 결국 서인들의 주도와 남인들의 동조가 이루어지며 인조반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폐비 유 씨마저 죽자 제주도로 이배 되었다가 1641년 18년의 유배 생활을 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 인조(능양군)는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인조의 동생 능창군이 역모 누명을 쓰고 자결하자 아버지 정원군 또한 화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복수를 꿈꿉니다. 결국 인조는 광해군을 반대하는 서인과 합심하여 반정을 일으키고 제16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광해군의 생애와 정치, 폐모살제, 인조반정의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임진왜란 중 전란을 수습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살생을 일으키는 과오를 저지르며 결국 반정으로 폐위된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