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국호를 대한 제국, 왕의 명칭을 황제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고종은 국가의 자주독립과 황제 중심의 체제 구축을 위해 광무개혁 추진하며 나라의 부국강병을 꿈꿨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10년에 일본에 국권을 찬탈당합니다. 대한제국의 성립과 식민지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의 성립
- 동학 농민 운동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청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청은 일본에 엄청난 배상금과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섬 등을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함께 조약을 문제 삼으며 삼국 간섭을 실시합니다. 이 일로 일본은 청에 랴오둥반도를 반환하고 일본은 조선에서 세력이 약해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 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일본군과 자객을 보내 경북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불태운 사건으로 일본인들은 재판 받지만 강화도 조약을 이유로 조선내에서 일본인들의 죄를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으로 모두 풀려나게 됩니다.
-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을 머물다 돌아온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국가의 위신이 크게 추락하자 고종은 국가의 자주독립을 확립하고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의 명칭을 황제로 바꾸면서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 대한제국은 구본신참(옛것을 근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의 이념을 가지고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근대적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기 위해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하였으며 양전지계 사업과 도시정보사업도 추진합니다. 양전지계 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소재를 파악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통해 합리적인 조세 부과로 국가 재원을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한국제국의 이런 노력에도 일본의 내정간섭으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합니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과정
- 대한제국은 대외적으로 중립국임을 선언하였으나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과 동시에 일본은 대한제국에 군대를 파견하며 강제로 '한일의정서' 체결하여 일본의 군사기지 사용권을 허용하고, 국외 중립선언을 무효화시켰습니다.
-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러시아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으며 1905년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되며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됩니다.
-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이상설, 이위종, 이준)를 파견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사실을 알고 이를 문제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킵니다.
- 이후 고종의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친일 인사들로 구성된 내각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장악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법권, 경제권, 경찰권을 피탈 당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까지도 박탈하게 됩니다.
-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며 일본은 강제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식민지화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헌병경찰제가 실시되며 조선왕조는 순종을 마지막으로 519년 만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 통치로 갖은 핍박을 받으며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일본의 강제적인 을사조약으로 고종은 특사를 통해 해결하고 싶었지만 실패하며 일본이 조선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국권이 박탈되며 총독부가 설치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며 1392년부터 1910년까지 27명의 왕이 승계되었고 519년을 존속했던 조선이 멸망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의 성립과 식민지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