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백범 김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습니다. 한인애국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하였고 젊은 시절 동학농민운동 활동에서 참가하였으며 한때 불교 승려로도 있었습니다. 애국계몽운동을 하며 교육자로서 교육에도 힘썼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생애와 활동,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생애
-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4세 때 천연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우며 학문을 쌓았습니다.
- 본관 안동, 백범, 아명 창암, 본명 김창수, 개명 김구입니다.
백범 김구의 활동
- 18세에 동학에 입도한 후 입교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신도를 수백명 거느리며 황해도 도유사 자격으로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 팔봉 접주로 임명됩니다.
- 19세에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의 동학군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며 일본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만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김이언의 의병대에 가입하여 활동합니다.
- 21세에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고향 안악으로 돌아가던 중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변장한 것을 수상하게 보고 을미사변의 범인이라 판단하고 처단합니다. 그 후 고향에서 머물다 해주 감옥에 수감되고 사형선고를 받지만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지만 석방은 되지 않아 탈옥합니다. 탈옥 후에는 출가 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환속합니다.
- 황해도 일대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과 계몽을 하며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합니다.
-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을사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동녕, 전덕기, 이준 등과 을사조약을 철회하는 상소를 올리며 대한문에서 읍소하고, 종로에서 연설 하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신민회에서 활동합니다.
- 신민회에서 활동 중 안중근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어 복역하다 특별 가출옥하여 동산평 농장의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백범 김구의 독립운동
-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여하며 경무국장, 내무 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령을 역임하게 됩니다.
- 이때부터 적극적인 항일 의거 활동을 시작하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일본영사관 폭파 시도, 이봉창의 일본 천황 폭탄 투척 미수 사건,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을 지휘하였습니다.
- 1933년 중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 낙양군관학교에 한국인 훈련반 설치를 협의하고 한국 특무대 독립군을 창당합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임명되며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섭니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그해 11월 환국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를 주도하며 통일 정부 수립를 목표로 적극적인 반탁 운동을 합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의 정부를 세우려 하자 평양에서 남북협상에도 임하였으나 통일 정부 수립에 실패하며 남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세워집니다.
- 김구는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조국의 영원한 분단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민족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친일파들에 처단을 위해 반민특위를 재개해야 한다고 소신 있는 발언을 한 것이 결국 암살의 원인이 됩니다.
-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맞아 피살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이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습니다. 김구가 피살되고 1년 뒤 6·25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백범 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광복 이후 남북한에 각각의 정부가 세워진 후에도 통일 운동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김구가 쓴 자서전 '백범일지'는 당시의 독립운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생애와 활동,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