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조선 제10대 왕으로 한국사에서 폭군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12년 동안의 재위 기간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극도의 폭정과 살육을 자행하다가 조선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따라서 묘호가 없으며 연산군이라고 불립니다. 연산군의 일생과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연산군의 일생
- 연산군은 1476년 조선의 9대 왕 성종의 적장자로 어머니는 후궁이었던 폐비 윤 씨였습니다. 연산군은 7세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어 12년 동안 왕세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성종이 사망 후 조선의 제10대 왕으로 안정적으로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즉위 이후 어린 시절 생모 윤 씨가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이는 추후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
-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후궁으로 얼굴이 중인 정도를 넘지는 못했으나 매우 동안이었으며 노래와 춤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연상이었던 장녹수는 연산군을 어린아이 대하듯 하다 노예처럼 다루기도 하였고 연산군은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그녀를 만나면 즉시 기뻐하는 얼굴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연산군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장녹수는 권세를 휘둘렀고 연산군 폭정의 길을 함께 한 인물로 연산군이 폐위된 후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
- 성종때 부터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위상이 높았던 시기로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 삼사 유생들과 갈등을 빚으며 대립하던 중 김일손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훈구파는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난하고 세조의 뒤를 이은 성종과 연산군의 즉위도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음모합니다.
- 연산군은 사림파들을 제거하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등을 처형하며 사림파를 견제하고 삼사의 역할을 축소하여 왕권을 강화하게 됩니다. (사화: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연산군의 갑자사화
- 연산군은 왕권이 강화되었음에도 이를 국정 개혁이나 발전적 방향이 아닌 연회, 음행, 탐닉, 금표 설치, 민가 철거, 발언 통제 등 본격적인 폭정의 길로 들어섭니다. 갑자사화는 친모 폐비 윤 씨의 복위 문제를 발단으로 발생하며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인물은 모두 처단합니다.
- 사림파는 물론 훈구파까지 많은 이들이 처벌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앞장섰던 후궁 엄씨와 정씨를 궁중에서 죽였으며 조모 인수대비를 찾아가 난동을 부렸으며 인수대비는 이 일로 화병이 나 세상을 떠납니다. 이 사건으로 폐비 윤씨를 제안왕후로 추승되었으나 연산군이 폐위되며 다시 폐비 윤씨로 원상 복귀됩니다.
- 갑자사화는 명분화 될 수 없는 연산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벌어진 일로 이후에도 2년 반 동안이나 향락을 즐기며 기생과 잔치를 벌이고 사냥을 즐겼으며 연회와 음행에 빠져 사치를 하며 국고를 낭비하였고 백성들의 원성 또한 높아졌습니다.
- 흥청망청은 연산군 때문에 생겨난 말로 술과 기생에 빠져 있던 연산군이 전국 팔도의 미녀를 구하는 채홍사라는 관리를 두고 각 지방의 미모가 아름다운 처녀를 뽑았으며 재주가 뛰어나면 '운평', 재주와 미모를 겸비하면 '흥청'이라 부르며 궁궐에서 같이 잔치를 벌입니다. 연산군이 흥청들과 노느라 망했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흥청망청'이라 부르며 유래하게 되었습니다.
- 결국 조선 역사에서 처음으로 신하들에 의해 반정이 일어나며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반정은 하룻밤 만에 성공하였고 연산군은 즉시 폐위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한국 역사에서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이 아닌 군으로 기록되며 폭군으로 남게 됩니다.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로 세자 수업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 강화에 대한 욕심과 폭정과 살육을 일으키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발생시켰고 결국 조선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폐위된 인물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