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제1대 임금이며 정치적으로 영리하고 뛰어난 지략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말 우왕의 명나라와의 전투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 회군하여 정도전과 함께 정권을 잡고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과 정치, 조선의 3대 정책 사대주의·농본주의·숭유억불, 이성계의 4불가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
- 이성계는 고려의 변방 출신으로 고려말 최영과 함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며 민중들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정도전의 선택을 받아 이성계를 중심으로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 무렵 명나라는 고려가 원에서 되찾은 쌍성총관부를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우왕(고려 32대 왕)과 최영은 전쟁을 결의하고 이성계에게 명나라 요동으로 가 싸울 것을 명령하지만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합니다. 결국 이성계는 왕명으로 요동으로 향하지만 결국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것은 유명한 위화도 회군(1388년)입니다.
-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토지 개혁을 단행하고 권문세족들의 소유 농장을 해체하고 조세 제도도 손보아 농민 생활을 안정시킵니다. 결국 1392년 이성계는 국호를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라는 의미로 조선이라고 국호를 짓고 조선의 제1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새로운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성을 쌓고 새로운 궁궐도 세우는데 그 중 경북궁은 조선 최초의 궁궐이었습니다. 조선의 3대 정책인 사대주의·농본주의·숭유억불을 세우고 농업, 경제, 군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의 국가 건설에 크게 기여를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정치
- 태조는 국가 시설을 재정비하고 조선경국전과 경제육전을 편찬하여 반포하였으며 명나라에 사대주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며 성균관과 향교를 세워 유교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으로 나라의 기반을 세우는데 특히 백성들에게 삼강오륜을 널리 알렸는데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고(군위신강),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섬김을 다해야 하며(부자유친), 어버이와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장유유서), 남편과 아내는 각자 할 일이 있으며(부부유별),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붕우유신)는 의미입니다.
-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앞장서고 큰 공을 세웠지만 태조가 세자 책봉 과정에서 총애하던 신덕왕후 소생의 자식을 세자로 책봉하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개국공신 정도전과 이복동생 둘을 죽입니다.
- 태조는 재위 기간이 불과 6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지만 이번에는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자식들의 권력을 향한 골육상잔(부모나 형제간의 싸움)을 지켜보며 고향인 함경도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한성부로 돌아옵니다. 이때 이방원이 이성계를 모셔 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내지만 차사를 모두 죽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하여 나온 말이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깁니다. 심부름 간 사람이 소식이 없거나 답이 오지 않을 때 쓰는 말입니다.
- 태조는 이미 57세에 최고령의 나이로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서 내려온 이후 상왕으로 7년을 살다 중풍으로 승하하였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건원릉입니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그리워하며 이례적으로 경복궁에서 가까운 곳에 능에 안장하였고 생전에 신덕왕후의 곁에 안장되고 싶어 했는데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를 미워했던 태종(이방원)은 후궁으로 지위를 격하하고 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 자리로 이장하고 왕릉에 사용됐던 십이지상들은 청계천의 광통교의 돌다리로 사용했습니다.
이성계의 4불가론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잘못이다.
- 정벌에 나간 사이 왜구가 침입할 가능성이 크다
- 여름철에 전쟁을 일으키면 농사 시기에 백성들의 생활을 위협할 수 있다.
- 군대가 장마로 인해 전염병이 돌 확률이 높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아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며 나라의 기반을 세우는 역할을 하였지만 말년에는 자식들의 권력 다툼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