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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이완용과 을사오적, 광복 이후 친일파 행적

by 현와 orca 2024. 4. 27.

친일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거나 이익을 꾀한 조선인들을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로 이완용이 있습니다. 특히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는 일본의 강제적인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한 인물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르며 이들에 의해 대한제국은 일본에 외교권은 물론 내정간섭을 받으며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결국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친일파 이완용의 생애와 을사오적, 광복 이후 친일파들의 행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친일파 이완용 생애

  •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선비였던 아버지 이호석은 이완용이 11살 무렵 먼 친척이었던 이호준에게 입양을 보냅니다. 양아버지 이호준은 대대로 노론 집안이었으며 흥선대원군과 민 씨 세력과 교류할 정도로 고위 관료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이완용은 1882년 25살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4년 뒤 고종의 눈에 들어 규장각 대교와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 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교육 기관이자 영어 교육을 하던 육영공원에 입교하여 신문물과 본격적인 근대화를 배우게 되며 친미성향이 됩니다. 1887년 주미 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이후 주미 대리공사로 승진하여 근무하다 1890년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대미협상을 맡기도 합니다.
  • 1895년 을마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이후 이완용은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이 계획을 하고 친러 내각을 조직합니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는 일본과 협정을 맺으며 조선에 각종 이권을 요구하며 내정 간섭을 시작합니다. 이에 이완용은 대미 협상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며 러시아의 압력으로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고 양아버지 이호준이 사망하자 정계를 떠나 삼년상을 치릅니다.
  •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고종은 이완용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며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우지만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권을 얻으며 일본과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체결했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기댈만한 외세조차 없어집니다. 이에 이완용은 친일파로 본격 전향하며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을사오적의 주축 인물이자 매국노가 됩니다.
  •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대한제국 내국 총리대신으로 임명됩니다. 1907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고종의 지시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일로 이완용은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킵니다. 순종 즉위식 당일 매국노 이완용을 규탄하던 군중들이 이완용의 자택을 불태우고 덕수궁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 1909년 7월 이완용은 단독으로 일본과 기유각서를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됩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고 그해 12월 명동성당 근처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고 폐가 관통되기도 하지만 살아남습니다.
  • 1910년 8월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에 직접 서명하며 대한제국은 조선총독부로 변경되고 일본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백작 지위를 받습니다. 일본에 의해 조선총독부 부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1운동을 비판하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일본 황실에 후작의 지위와 훈장을 받으며 부와 권력을 누렸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도우며 친일파이자 매국노로서 활동합니다.
  •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일본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으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임명받습니다.

 

을사오적

  •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군을 이끌고 어전 회의장에 들어와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었으며 이에 찬성한 다섯명의 대신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릅니다. 을사오적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을 말합니다.
  • 을사조약 체결 당시 고종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찬성을 재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정치에도 개입했으며 고종은 을사조약의 강제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일로 강제로 퇴위당하게 됩니다.
  • 을사오적은 일본에 공로를 인정받아 은사금과 고위 관직과 작위까지 받으며 부와 권력을 누립니다. 한편 을사조약이 알려지자 전국에서는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한 의거 활동과 암살단이 구성되기도 하지만 실패하였으며 이완용은 1909년 이재명의 칼에 맞아 상처를 입지만 살아납니다.

 

광복 이후 친일파들의 행적

  • 1948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친일파 청산을 시도했으나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 내각 구성원의 방해로 무산됩니다. 친일파들은 해방 이후 처벌을 거의 받지 않고 오히려 반공투사로 위장하여 애국자로 신분을 포장하며 고위직을 맡으며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 2004년 3월 22일 정부 주도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반민규명위를 설치하고 이후 1,005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이 반발하며 소송을 벌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광복 이후 친일파 청산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파들이 고위직에 복귀하며 논란이 됩니다.

친일파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보냈으며 광복 이후에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에 고위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며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친일파 청산 문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친일파 이완용의 생애와 을사오적, 광복 이후 친일파들의 행적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